관리 메뉴

www.kinocine.com 박재환 영화이야기 (페이지 리뉴얼 중)

중국대만 금마포격전과 연평도 포격전 본문

雜·念

중국대만 금마포격전과 연평도 포격전

박재환입니다. KBS미디어★박재환 2010.11.29 16:12



광저우 아시안게임 기간동안 중국에서 열심히 대한민국을 응원하고 있는 동안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북한이 연평도에 포를 퍼부어 군인은 물론 민간인 사상자까지 발생한 것이다. 대통령은 오늘 오전 긴급담화를 발표하고 “두번 다시 봐주지 않겠다.”는 결기를 내보였다. 중국은 그 와중에 해결책이랍시고 “조속한 6자회담 성사 운운”했다. 한반도의 전운은 그렇게 높아만 간다.

여기서 잠깐 중국과 대만의 유사사례를 생각해 보았다.

1911년 이른바 신해혁명이 성공하면서 수천 년 이어오던 황제의 나라는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그 넓은 땅 떵어리와 그 많은 사람들을 차지하기 위해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이데올로기 전쟁이 펼쳐진다. 결국 모택동의 공산당이 대륙을 접수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장개석의 국민당은 작은 섬, 대만으로 쫓겨난다.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것은 1949년 10월 1일이다. 작은 섬나라 대만에서 장개석은 절치부심 ‘자유중국’ 수복을 외친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미국은 공산세력의 확장을 우려하여 한국과 대만을 적극지지, 지원, 수비한다)

장개석은 하루 빨리 대륙을 수복하고 공산당 세력을 궤멸시키고 싶어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모택동은 대만마저 공산화시키려고 하지만 그것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미군이 지키고 있기 때문. 그리고 중공군의 숫자는 많아도 대만의 군사력이 월등하였기 때문. 미군 7함대가 대만해협에 진입하면서 중국(중공)의 위기감은 고조된다.

중국과 대만이 그렇게 갈라진 뒤 10년 정도 흐른 1958년. 그 중국과 대만에 일촉즉발 전쟁상황이 펼쳐진다. 화약고는 대만과 중국 사이에 위치한 섬. (우리나 백령도, 연평도처럼!) 대만 서쪽 중국 측에 바싹 붙어서 금문, 마조 등이 위치해 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금문, 마조는 바로 중국에 붙어있고 대만은 저 멀리 있다. 전략적 요충지 중의 요충지인 셈. 대만 사람은 ‘금문’과 ‘마조’를 아주 중시한다. 그 앞자리를 따서 ‘금마’영화상을 만들었다.

목에 가시로 여기던 모택동이 1958년 8월 23일. 포격전을 시작한다. 무려 13일간 계속된다. 중국(중공)은 작심하고 금마도를 날리려고 맹폭을 시작한 것이다.

이미 그 전부터 대만은 중국의 의도를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금마도에 진지를 구축하고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무기를 지하에 가득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장개석은 금마를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50년이 지나 당시의 상황은 거의 다 알려졌다. 중국의 공세, 대만의 준비 등이 양측 관계자(장군, 정치가 등) 회고록 등을 통해 많이 알려진 것이다.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30분. (당시 대만은 섬머타임 관계로 오후 5시 30분) 중공군은 샤먼, 선터우, 렌허 등지에 산재한 38개 포병진지에서 459문의 포문을 열어 궤멸성 포격을 시작한다. 순식간에 금문방어사령부의 대만군 부사령관 3명이 즉사하고 400여 명의 군인이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6분 뒤 대만군의 반격전이 시작한다. 금문의 80여 포문이 당일 저녁 9시 10분까지 포격전이 계속된다. 중공군은 두시간 남짓동안 5만 여발의 포탄을 금문도에쏟아부은 것이다.

당시 대만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금마도에서 포격전이 이어지자 16일째 되는 날 대만군과 미군이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금마도를 향했지만 중공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미군이 황급히 회항하는 사태가 일어났단다. 대만군은 불만이었고.. 여하튼 중국(중공)의 포격은 격화되고 미군은 수수방관하더니.. 결국 미 공군사령부에서 대만해협이 불안정할 경우 원자탄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겠다고 발표한다.

1958년 11월 16일. 대만과 미국은 합의에 도달한다. 금마도 대만해협의 위기가 가라앉으면 점진적으로 금마도에 주둔하는 대만군 숫자를 1개 보병사단 수준(1만 5천명)으로 점진적으로 줄이기로 하고 대신 무기를 대폭 강화하기로.

대만과 중국간의 포격전은 해가 바뀌어도 계속된다. 1959년 1월 7일. 중국은 대만에 대해 2만 4천 9백여 발의 포탄을 쏘고, 대만은 이에 대해 1만 여발의 포로 응수한다. 

그러면서 포격전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기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거의 상징적인 포격전이 계속 되는 것이다. “포격전은 실지로는 상징적인 차원이다. 양측이 협의를 한 적은 없지만 일종의 불문율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금문을 향해 포를 쏘더라도 군사진지나 민간거주지에는 포를 쏘지 않는다. 단지 해안에만 쏜다. 그럼 금문도의 대만군도 똑같이 우리의 해변 쪽에다 포를 쏠 뿐이다.” 이런 기이한 포격전은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된다.

* 정확한 포격 중지 시점은 1979년 1월 1일이다. 미국이 대만과의 관계를 끊고 중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한다. 그에 맞춰 중국의 국방부장이 <<금문 등 도서지역 포격 중지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다. 21년간 계속된 포성이 멈춘 것이다.

중국과 대만은 그렇게 전쟁같은 전쟁, 전쟁같지않은 전쟁을 이어오다 요즘 같은 밀월(?)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대만이 한 수 접고 중국에 들어가는 형국이지만 말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중국사람은 중국-대만 관계를 복잡하게 보면서도 이렇게 이해한다. “천하가 오래 갈라져 있으며 합쳐지기 마련이고, 오래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쪼개진다.” 뭐, 삼국지에 나오는 말일테다. 중요한 것은 저쪽이 치면 이쪽이 쇼를 아니든 반격, 리액션을 보여야한다는 것. 허장성세가 되었든 아니든... 그렇지 않으면 “뭐야, 저거 아무 것도 아니잖아...”라는 허약한 메시지만 줄 뿐이다.  (박재환)

(이 내용은 주로 2008년 중문시사주간지 <<아주주간>>에 나왔던 이야기를 기초로 소개한다.)

823 금마포격전에 대해서 더 알아보시려면 여기

http://baike.baidu.com/view/503773.htm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