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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죄수] 테이프로 남긴 조자양의 비밀 회고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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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죄수] 테이프로 남긴 조자양의 비밀 회고록

박재환입니다. KBS미디어★박재환 2010.09.13 16:44

천안문사태를 아는가. 천안함 말고.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광장에서 민주화 시위를 펼치던 중국 학생들을 중국 인민군 부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강제유혈진압을 한 사건이다. 당시 수백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사료된다. 1989년 6월 4일 새벽에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육사사건(六四事件)이라고도 한다. 이미 20년이 더 된 일이다. 난 기억한다. 당시 다니던 학교가 학내민주화랍시고 어수선하던 때였다. 친구랑 어디 여행이나 가자고 나서는 길에 친구가 <<한겨레신문>>을 보여주며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 난다. 저 멀리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 앞에서 중국대학생들이 민주화시위를 벌인 것은 4월부터였고 한국 신문에도 매일같이 급박한 현지상황이 전해지던 때였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 광주에서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을 때 외부로 그 실체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었다. 1989년, 중국 천안문에서 어떤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사태진압 후 등소평이 활짝 웃으며 군 지휘부와 면담하는 사진이 한동안 천안문 유혈진압비극의 상징적 사진으로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탱크에 맞선 한 남자의 사진과 ‘한 명도 죽지 않았다는’ 중국당국의 공식발표와는 달리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다는 이야기가 서구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당시의 끔찍한 사진, 동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89년 6월 4일 새벽. 천안문 광장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쉽게 재조립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쩌다가 사태가 그까지 일어났을까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은 등소평이 이미 죽었고, 중국공산당과 중국 정부는 여전히 천안문사태를 밝히기 꺼려하는 과거의 유산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이때 꽤나 흥미로운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다. 바로 <국가의 죄수>라는 제목의 책이다. 책의 저자가 바로 천안문 유혈사태 당시 ‘공식적으로’ 중국의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조자양(趙紫陽,짜오쯔양)이기 때문이다. 육사사건 당시 이미 나이 85살이었던 등소평은 공직에서 하나둘 물러나고 군사위 주석이라는 지위만 유지하고 있었다. 단지 군사력을 손에 쥐었다 해서가 아니라 ‘등소평’이라는 이름과 아우라만으로 그는 당시 중국공산당의 큰 어르신이며 10억 중국인의 영혼과 생명을 관장하는 파워맨이었다! 당시 조자양은 총서기(中國共產黨中央委員會總書記)였다. 물론 이것은 대단한 직책이다. 아니 중국 국가의 공식적 최고자리에 해당한다. (지금 김정일의 북한 직책은 노동당 총비서이자 국방위위원장이다)

1989년 4월에서 6월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다.

1949.10.1.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중공, 대륙을 완전 접수하다!) 이후, 모택동이 중국을 완전 장악한다.
1976.9.9 모택동 주석이 사망하고, 사인방이 몰락하며 등소평이 새로운 권력자가 된다.
1979. 12. 중국현대사를 배웠으면 보통 중공 11기 3중전회(中國共產黨第十一屆中央委員會第三次全體會議)를 기점으로 중국이 등소평의 리더십아래 개혁개방에 뛰어들었다고 배운다. 이제 돈 버는 일만 남은 것이다. 고양이가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1989.4.15 호요방(후야오방) 총서기 사망하다. 호요방은 등소평에 의해 발탁되어 총서기로 있다 쫓겨난다. 호요방이 죽자 중국인민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추모의 뜻을 표하고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민주화 시위로 확대된 것이다.

1949년 공산당혁명에 성공한 뒤 중국은 모택동의 절대권력 하에 연명한다. 모택동이 죽은 뒤 등소평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등소평은 개혁개방에 나서 가난하고 헐벗은 중국을 오늘날의 중국으로 올려놓기 위한 엄청난 사전 정지작업을 한 셈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주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본주의의 도입 속도와 관련한 정치투쟁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등소평을 흑묘백묘론의 탁월한 지도자라고 해도 ‘공산국가 중국’의 정체성을 일거에 엎을 수는 없는 일이다.(결과론적으로.. 고르바쵸프의 꼴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총서기 호요방과 의견대립이 있었다. 폭발하는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중국인민들에게 집결할 명분과 역사적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호요방 전(前) 총서기의 갑작스런 죽음처럼 중국의 운명도 갑자기 돌변하게 된 것이다. 중국이 자본주의로 급속도로 뛰어들기 일보직전, 바로 그 출발선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대학생들이 모였고, 시민들이 모였고, 그들은 울었고, 분노했고, 대자보를 붙이고, 요구조건을 내건다. 하루 이틀, 일주일, 열흘, 한 달이 지나면서 천안문 광장에는 ’중국당국‘이 당황할 만큼 시위참여자가 늘었고 그들의 주장은 충격적일만큼 과격화되어갔다. 등소평 물러가라! 이붕 하야하라! 민주화 이루어라! 이런 격문까지 등장한다.

온갖 정치투쟁 끝에 겨우 나라를 안정화시키고, 이제 경제에 매진하고픈 등소평이나 이붕(李鵬) 국무원 총리는 타고난 보수파였다. 이들이 보기에는 천안문에 모인 패거리는 진작 쓸어버려야할 ‘반동새끼’들이었다. 그런데 ‘조자양’ 총서기가 미적거린 것이다. 강제 진압과 해산보다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들의 정치적 역량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등소평-이붕, 그리고 군부지도자는 조자양을 지휘부에서 격리시키고, 천안문광장을 유혈 진압한 것이다. 그날 이후 조자양은 2005년 1월 17일 죽을 때까지 15년을 베이징의 자택에서 연금 당한다. 조자양의 죄목(!)은 사태진압 이후 곧바로 열린 중공 13기 4중전회에서 이붕 총리가 주동이 되어 통과시킨 문건(關於趙紫陽同志在反黨反社會主義的動亂中所犯錯誤的報告)에 나와 있다.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조자양은 이날로 중공중앙총서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위원과 중앙군사위원회 제1부주석 자리를 동시에 박탈당하고 오직 중국공산당당원이라는 당적만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 열린 전인대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부주석 직무까지 빼앗긴다.  이후 조자양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물론이고, 천안문사태에서의 정확한 역할에 대한 해명/변명/설명도 못한 채 연금 신세에 처해진다.

조자양, 육성으로 역사를 남기다.

이 책은 조자양이 자택에 연금 당했을 때 틈틈이 남긴 육성테이프를 옮긴 것이다. 한 많은 정치가의 회한에 가득한 회고록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 책은 천안문사태 15주년에 맞추어 2009년 5월 출판되었다. 미국에서는 영문판 < Prisoner of the State: The Secret Journal of Premier Zhao Ziyang>(국가의 죄수: 자오즈양 총리의 비밀일기)라는 제목으로, 홍콩에서는 <개혁역정>(改革歷程)으로, 대만에서는 <국가의 죄수: 조자양의 비밀녹음>(國家的囚徒:趙紫陽的秘密錄音)이라는 제목으로 잇달아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년 뒤인 올해 5월, 에버리치홀딩스에서 <국가의 죄수>로 번역출간되었다.

 작년 이 책의 출판에 즈음하여 중문 시사잡지 <아주주간>에서는 발췌문과 출판저간의 사정이 알 수 있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도 흥미로웠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그의 부하이며 동료, 친구였던 노간부들의 위험한 노력이 있었단다. 1989년 조자양이 가택연금에 들어가고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조자양의 역사적 인물, ‘육사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이 분명 존재했던 것이다. 1992년경부터 이들은 조자양에게 어떤 기록을 남기자고 권하기 시작한다.  <<광명일보>> 편집장을 역임한  전 국가신문출판서(國家新聞出版署) 서장 두도정(杜導正,두따오쩡), 국무원비서장과 사천성 서기를 역임한  두성원(杜星垣,뚜싱위앤),   중앙기율위 부서기, 광동성 상임위 출신의 소홍달(蕭洪達,샤오훙다), <광명일보>와 광동성 판공실에서 일한 姚錫華(요석화,야오시화) 등이다. 그리고 이 회고전 집필 작업에 전 광동성 서기였던 임약(林若,린뤄)이 녹음기와 테이프를 제공해준다. 이들 가운데에는 이미 조자양처럼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 모두가 이제 죽음에 초연한 신세이다. 올해 86살의 두도정은 6월 4일 전후를 피해 출판을 기대했으나 작년 육사에 맞춰 책이 발간되었단다.


자오즈양 육성 들어보기

남아있는 테이프로 보면 조자양의 구술녹음작업은 2000년 무렵에 시작되었단다. 1~2년 동안 조자양은 모두 30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남긴다. 조자양이 죽은 뒤 그의 세 친구들이 비밀리에 테이프를 반출시킨다. 조자양의 전 비서였던 포동(鮑彤,빠오통)이 조자양의 육성임을 확인시켜줬단다. 워낙 비밀스레 진행한 작업이라서 조자양의 가족들도 그 내막을 잘 몰랐단다. 녹음테이프는 모두 세 세트가 복사되어 따로 보관되어 보존되다가 힘들게 출판된 것이란다.

솔직한 독후감

여기까지는 뭐. 중국현대사에서 조자양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소개한 셈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했다. 조자양은 육사사건 당시 사태가 극도로 악화되고 있음에도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 셈이다. 그는 학생들의 주장에 대해 적극적인 찬동의 행세를 한 것이 아니라 ‘동정’하는 모습을 엿보인다. 그것이 보수파의 불만을 싸게 되고 유혈진압 이후 이어지는 자아비판에서도 애매하게 나타나다. 하다못해 회고록에서도 그런 ‘주저함’이 느껴진다. 그러니, ‘역사의 당사자의 애매한 현장기억록’으로 보면 될 듯하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두다오정의 서문과, 조자양의 정치비서였던 바오퉁이 쓴 머리말이 있다. 쉽게 해제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조자양의 구술은 육사사건/ 연금의 심정/ 개혁개방과 13가지 문제/ 후야오방 시대에서 자오쯔양 시대로/ 거대한 변화 1988년/ 개혁의 이름으로 등 6개 챕터로 구성되어있다. 역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1장. 육사사건에 대한 조자양의 회고이다. 몇 가지 논점을 남긴다. 천안문 시위가 격화되자 중국(공산당 지도부)은 <<인민일보>>를 통해 당국의 입장을 밝힌다. 이른바 ‘ 426 인민일보 사설’이다. 사설 제목은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에 반대해야한다”(必須旗幟鮮明地反對動亂)이다. 조자양은 이 사설 때문에 학생들의 분노가 더욱 거세졌다면서 사설에 대한 거부반응을 줄곧 보여준다. (사설이 실릴 무렵 조자양은 북한을 방문 중이었단다. 5월 중순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찾았다. 이때 조자양은 고르바초프에게 “등소평이 여전히 중국의 실권자이다”라고 말한 것 때문에 또 한바탕 법석을 뜬다. 최악은 5월 19일 새벽에 조자양이 광장을 직접 찾아 단식 투쟁 중인 학생들에게 즉석연설을 한 것이다. (이 장면은 유튜브에 동영상이 있다! 당시의 어수선한 광경을 엿볼 수 있다.) 이날 조자양이 학생 앞에서 한 말은 이런 것이다.


“학생여러분, 우리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학생여러분 미안합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꾸짖고 비판하는 것은 모두 당연한 일입니다. .. 여러분이 단식한지 벌서 7일째이며 더 이상 지속해나갈 수 없습니다... 단식을 조속히 끝내 .. 저도 여러분이 제기한 요구에 대해 당과 정부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길 원해서 단식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답을 얻으려면 대화채널을 활짝 열어놓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날 사진을 보면 조자양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띈다. 당시 조자양의 비서였던 온가보(溫家寶,원자바오)이다. 지금 중국경제를 총괄하는 총리가 되어있다.)

조자양은 연금상태에서 결국 숨을 거둔다. 2004년 1월 17일. 신화사는 단지 짧은 한줄 기사만 보도한다. “조자양 동지는 오랫동안 호흡기계통과 심혈관 문제로 앓아왔다. 병원입원을 거듭하다 최근 병세가 악화되더니 1월 17일 북경에서 별세했다. 향년 85세. (▶여기)

등소평도 죽었고, 조자양도 죽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이붕(李鵬,리펑)이 있다. 당시 국무원 총리였다. 육사사태이후 유혈참극의 총지휘자는 등소평, 그 회자수는 이붕이란 게 일관된 분석이다. 오늘날 등소평보다는 이붕에게 화살이 집중된다. ‘천년왕국 중국’을 지키기 위한 자신의 우국충정을 알아주지 못해 억울한 면이 있을지 모른다. 지난 1991년 <<인민일보>>에는 칠언율시가 하나 게재되었다. 평이한 시(詩)인줄로만 알았는데, 누군가가 ‘장난’(!)을 친 것이란다. ‘李鵬下臺平民憤’ (이붕이 물러나야 인민의 화가 풀린다)이라는 내용이 교묘하게 삽입된 시이다.
 
东风拂面摧桃李/ 鹞鹰舒翅展鹏程 / 玉盘照海下热泪 / 游子登台思故国/ 休负平生报国志 /
人民育我胜万金 / 愤起直追振华夏 / 且待神州遍地春

이붕은 육사사태 당시 꾸준히 일기를 썼단다. 그 일기를 책으로 냈단다. 홍콩에서 발매된 <이붕육사일기>(李鵬六四日)는 이붕의  1989년 4월 15일부터 6월 24일까지의 일기가 수록되었단다. 이 책의 홍콩출판에는 사연이 있다. 이붕은 2003년 현직에서 물려났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해야했고 언젠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을 밝히고 싶어한 모양이다. 15주년을 맞아 2004년 일기를 출판하려고도 했지만 당의 만류도 한 차례 좌절되었단다. 홍콩에서는 신세기출판사(新世紀出版社)에서 출판할 예정이었단다. 바로 조자양의 <국가의 죄수>가 출판된 회사. 이 출판사 사장은 포박(鮑樸,바오푸)이다. 조자양의 비서였던 포동(鮑彤,빠오통)의 아들이다. 이 책은 저작권문제로 결국 다른 출판사에서 먼저 출간되었단다. 바오푸는 <조자양의 국가의 죄수>나 <이붕의 육사일기>나 모두 역사적 인물의 기록이니 모두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진실여부는 따로 판단할 문제이고 말이다. <이붕의 육사일기>도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5월 2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동란발생하면서부터 나는 이미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었다. 나와 나의 가족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중국에서 두 번다시 문혁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야한다는 것이다.” ‘문혁’의 비극을 알기에 이붕은 아마도 저렇게 비장하게 각오한 모양이다. 이붕의 일기에서는 천안문진압의 책임을 등소평에게 넘기고 있다고 홍콩평론가들은 분석했다.

어쨌든, 중국현대사에서 천안문사태가 가지는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조자양도, 이붕도 읽어야하고., 로우예 감독의 영화 <여름궁전>도 봐야한다. (박재환 20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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