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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덴버그] 하늘을 나는 타이타닉의 최후 본문

雜·念

[힌덴버그] 하늘을 나는 타이타닉의 최후

박재환입니다. KBS미디어★박재환 2009.05.04 09:30


   아주 옛날 언젠가 TV에서 방영된 한 편의 영화에 매료된 적이 있다. 그 영화의 제목은 <힌덴버그>(힌덴부르그,The Hindenburg)였다. <사운드 오브 뮤직>,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영화를 만든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1975년도 작품이다. 어릴 때 TV에서 본 영화란 게 대개 그렇듯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후 '힌덴버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고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쉽게 구해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브로드앤 TV(IPTV)에 이 영화가 신규로 올라와 있더라. 아주 반가운 마음에 다시 보았다.
 
   '힌덴버그'는 독일의 비행선(airship) 회사 체펠린(Luftschiffbau Zeppelin)사의 야심작이다. 이 회사에선 일련의 비행선을 만들었는데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129번 비행선'이다. 이 비행선에는 독일 ‘대통령’이었던 고(故) 힌덴버그의 이름을 따서 '힌덴버그 호'로 명명되었다.
 
    힌덴버그 호는 1937년 5월, 독일을 떠나 미국 뉴저지 주 레이크허스트의 미 해군기지 (Naval Air Station)로 날아갔다. 당시 기지의 일기는 극히 불안정했다. 5월 6일, 저녁 7시 무렵 기장은 착륙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고 온통 수소 가스로 채워진 비행선은 불과 30여 초 만에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 사고로 36명의 승객 중 13명이, 61명의 승무원 중 22명이 죽었다. 그리고 비행선 착륙을 돕던 지상요원 한 명이 숨졌다. 나찌 히틀러가 독일을 집어삼키고 그의 명성을 하늘 높이 띄워 미국에까지 선전하려고 했던 '힌덴버그'는 이처럼 허망하게 사그라져버린 것이다.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 하나   
 

체펠린 백작인 만든 하늘의 궁전 '체펠린 비행선'
 
   이보다 사반세기 (=25년) 전인 1912년 4월의 어느 한밤중에 대서양에서 빙산에 부딪혀 4킬로미터 심연 속으로 가라앉은  <타이타닉>이야기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힌덴버그'사고 또한 많은 충격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예술적, 혹은 미학적 감성을 남겼다. 마치 CNN이 전하는 이라크 전황과 여객기가 뉴욕 쌍둥이빌딩으로 돌진한 911테러 때처럼) '힌덴버그' 사고도 거의 실시간으로 미국인에게 전달되었다. 현장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있었고 생생한 뉴스릴 필름이 남아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도 사고 원인을 규명한 책들이 나왔다. 불붙기 쉬운 수소가스를 실었다는 것이 화재사고의 결정적 원인으로 보이지만 대중에게 가장 흥미로운(선정적인) 원인으로 이른바 '사보타쥬 론(論)'이 주목을 받았다. 사보타쥬는 '태업' 뿐만 아니라 '파괴행위'도 뜻한다.  즉, '힌덴버그 사고'는 당시 독일 나치 히틀러에 대항한 세력이 히틀러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누군가 ‘테러’의 일환으로 폭발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다룬 책 중 하나가 1972년에 나온 마이클 무니(Michael M. Mooney)의 <<힌덴버그>>이다. 영화는 이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제작 도중에 표절 등의 혐의로 횔링(A. A. Hoehling)이란 작가가 소송을 건다. 횔링은 1962년에 <<누가 힌덴버그를 파괴했나>>(Who Destroyed the Hindenburg?)를 내놓았는데 그 책에서도 ‘사보타쥬 이론’을 내세웠었다. 표절시비와 관련된 미국의 재판결과 횔링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역사적 사고에 대한 해석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버트 와이즈 감독은 영화제작 단계에서 많은 자료를 보았고 이러한 '사보타쥬' 이론을 적절히 안배하여 창공 스릴러를 만든 것이다. 


  
    
   독일 비행선의 역사는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Ferdinand von Zeppelin, 1838-1917) 백작의 역사이다. 체펠린은 독일군 기병장교이며  퇴역 후 비행선 개발과 항공사업에 일생을 바친 '비행선의 아버지'이다. 1898년 프리드리히샤펜에 체펠린 회사를 세운 후 비행선 개발에 나선다. 첫 번째 비행선 Zeppelin LZ-1(길이 128미터)은 1900년 7월 2일 하늘을 유영했다. 독일군(육군/해군)은 정찰용으로 체펠린 비행선을 구매했다. 이후 1910년이 되어서야 체펠린 비행선(LZ-7)은 독일 도시 간을 오가며 승객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4년 동안 1만 명 이상을 승객을 실어 나른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은 체펠린 비행선을 군사용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런던과 영국의 여러 도시에 폭탄을 투하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초기엔 대량의 폭탄을 효과적으로 투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면서 영국의 방공망이 자리 잡자 체펠린의 비행선도 손상을 입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꽤 많은 비행선이 만들어지고 전쟁에 투입되고 창공에서 산화했다.
 
 독일 비행선과 나치 히틀러

 
   영화, 아니 '힌덴버그'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당시 독일 상황을 조금 알아두면 더 좋을 듯하다. 지금의 독일은 서독과 동독이 합쳐진 지역이지만 20세기 초만해도 독일은 독일, 오스트리아, 프로센, 폴란드, 헝가리, 룩셈부르크, 프랑스 등등의 인근 국가들과 땅들이 지금의 국경과는 조금 다르게 형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이후 패전국 독일의 국경에는 조금의 조정이 있었다. 1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은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야했다. 빌헬름 2세가 퇴위하며 군주제는 막을 내린다. 이때 들어선 정부를 이른바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군주제 시절 독일군 원수였던 힌덴부르그(힌덴버그)가 공화국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제 정파간 정권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당시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당, 이른바 (나치당)의 히틀러가 국민의 대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권력실세가 된다. 힌덴부르그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총리 자리를 내주었고, 유럽은 또 다시 전운에 감싸인다. (*1934.8.2  힌덴부르크 대총령 서거. 아돌프 히틀러, 대통령 겸 수상인 총통에 취임.*) 


  
  전후의 독일의 정치판은 살벌했지만 비행선을 이용한 항공산업은 군수산업 못지않게 발전을 거듭한다. 체펠린이 죽은 뒤 체펠린 회사(Luftschiffbau Zeppelin)를 운영한 사람은 휴고 에커너(Hugo Eckener)이다. 그는 비행선의 크기를 점점 키워나갔다. 1928년, LZ-127  그라프 체펠린(길이 236미터)을 런칭시켰다. 이 비행선에는 39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었다. 미국의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이 비행선의 잠재성, 그리고 그것의 뉴스가치를 꿰뚫어보고는 10만 달러라는 거액을 지급하며 비행 모습을 찍는 권리를 획득했다. 당시 ‘허스트 사’가 찍은 그라프 비행선의 모습은 장관이다. 그라프가 독일을 떠나 뉴욕에 들어올 때 뉴욕사람들은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손수건을 흔들며 환호했고 그라프 착륙지점으로 인파가 쇄도했다. 마치 2년 전 대서양을 횡단했던 찰스 린드버그가 그랬던 것처럼 독일인 '에커너'는 브로드웨이에서 카 퍼레이드를 펼치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미국 후버 대통령과 면담까지 갖고 말이다. 여하튼 하늘을 떠다니는 엄청나게 큰 인공구조물 비행선은 미국인에게 엄청난 충격과 감동과 미래에 대한 꿈을 안겨주었다. 미국인은 열광했고, 아이들은 하늘에 대한 꿈을 키웠다.   

힌덴버그 - 보잉747 - 타이타닉 크기 비교
  
   에커너는 유럽(독일)과 미국을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체펠린 개발에 열을 올렸지만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전쟁분위기는 짙어만 갔다. 그 와중에 에커너는 꿈의 비행선 힌덴버그(LZ-129)를 완성했다. 길이는 245미터. 동체 용적이 155,763㎥로 역대 최대 크기이다. 

힌덴버그의 규모는 거의 호텔급이다.
  
   ‘힌덴버그 호’는 1936년 3월 4일 첫 시험비행에 나서 3시간 6분을 하늘을 떠다녔다.  ‘힌덴버그’는 그해 8월 북대서양 횡단에 최단시간을 기록했다. 8월 10일 02시 34분에 미국 레이크허스트에서 출발한 힌덴버그는 다음 날 밤 9시 26분에 독일 프랑크프루트에 도착했다. 당시 가장 빨리 대서양을 건널 수 있는 교통수단은 퀸 메리, NORMANDIE, BRENMEN 등의 여객선이었다. 이들은 닷새가 소요되었다. 그러니, 한번에 50명 정도의 승객을 싣고 이틀 만에 건너는 비행선은 경쟁력이 있었다. 비록 요금이 선박에 비해 두 배 정도 비쌌지만 그 정도는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돈 많은 여객'에게는 장애요소가 아니었다. 

  힌덴버그 다큐에 나오는 장면. 힌덴버그가 대서양횡단 중 여객선을 만나자 기념으로 하늘에서  삼페인을 공수한다. 첫번째 시도는 실패하고, 두번째는 성공한다. 
  
 힌덴버그의 최후 


  
   1936년 시즌을 끝으로 재단장에 들어갔던 힌덴버그는  1937년 5월 새로이 뉴욕행에 나선다. 5월 3일 예정대로 출발한다. 이 날 에커드는 탑승을 하지 않았고 대신 어네스트 레먼이 선장을 맡았다. 모두 97명이 탑승했다.  그리곤 1937년 5월 6일 도착예정지인 레이크허스트에서 원인불명의 폭발사고로 장엄하게 산화한다.
 
CNN의 할아버지, 현장중계의 기원
 
  당초 힌덴버그는 5월 6일 (목요일) 06시에 레이크허스트 공항(정확히는 미군기지)에 착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북대서양을 지날 때 난기류에, 공항 인근 악천후로 인해 착륙시간이 점차 뒤로 미뤄져다. 비행선이 레이크하우스 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후 3시 30분이었다. 선회비행을 계속하다가 기상이 조금 좋아지자 저녁 7시 무렵 착륙을 시도했고 얼마 뒤 불이 붙고 추락한 것이다. 공항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 있었다. 체펠린 사는 이 엄청난 구경거리, 볼거리, 사업아이템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을 레이크하우스에 불러들인 것이다. 물론 카메라 기자와 함께 당시 동영상기자였던 뉴스릴 카메라맨도 여러 명 있었다. 아직 TV시대도 아니었고, 전국적 라디오 생방송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당시 뉴스 동영상은 한때 우리나라 극장에서 본영화 상영 전에 볼 수 있었던 ‘대한뉴스’같은 거였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는 4개의 뉴스릴 카메라가 있었다. 파테(Pathe), 파라마운트 뉴스(Paramount News), 무비톤 뉴스(Movietone News), 허스트(Hearst)이다. 유니버셜 뉴스릴(Universal Newsreel) 카메라는 현장 기상이 악화되자 일찍 자리를 떴다고 한다. 이들이 각기 찍은 동영상이 역사에 남는 '힌덴버그 사고 장면'이다. 이날 추락장면을 그대로 중계한 사람이 있다. “힌덴버그가 하늘에 떠 있습니다. 착륙하고 있습니다. 오, 맙소사, 불이 났습니다......"라며 정말 숨넘어가는 소리로, 나중에는 울먹이며 중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 남아있다. 하는 급박한 목소리로 생중계한 인물은 시카고 라디오방송사 WLS의 ‘라디오 리포터’ 허버트 모리스이다. 그는 엔지니어 찰리 닐슨과 함께 현장에서 힌덴버그의 착륙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생방송을 한 것이 아니라 녹음을 준비 중이었다. 당시 뉴스릴처럼 오디오도 현장에서 녹음이 되어 ‘디스크(lacquer disk)’에 복제되어 전국 라디오네트워크로 전달되던 시스템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 역사적인 ‘오디오’로 평가받고 있다.
 
할리우드가 만든 힌덴버그 음모론 


 
 
  로버트 와이즈의 영화 <힌덴버그>는 실화를 흥미롭게 각색했다. 영화 시작하면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에서 어떻게 비행선까지 진화되었는지를 활동사진 형태로 보여준다. 체펠린 사의 놀라운 발명품 ‘힌덴버그’의 완성장면과 함께 말이다. 이제 힌덴버그호가 미국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흥미로운 ‘음모론’을 다룬다. 웬 미국아줌마 예언자는 ‘힌덴버그가 뉴욕상공을 지날 때 폭발할 것’이라는 편지를 미국주재 독일대사관에 보낸다. 출발 사흘 전, 베를린의 공군기지에 전투기 한 대가 내린다. 스페인에서의 작전을 끝내고 귀환한 프란츠 리터 대령(죠지 C.스코트)이다. 그는 전투기에서 내리자마자 게슈타포에게 소환된다. 그에게 특수임무가 맡겨진다. 낼 모레 출발하는 힌덴버그 호의 보안장교로 탑승하라는 독일 선전성 괴벨스의 명령이 내려진다. 힌덴버그를 폭파시키겠다는 첩보가 입수된 상태였다. 나찌와 히틀러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던 리터 대령은 힌덴버그가 나찌 선전에 이용되는 게 마뜩찮다. 마지못해 힌덴버그에 오른 그는 날카로운 직관력으로 승객들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물론 그를 관찰하는 게슈타포 포겔도 동승한 상태이다. 미국으로 향하는 짧은 여정 속에 비행선 내부는 나름대로 이런저런 압축된 그랜드호텔식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 재산을 독일에 헌납한  우르술라 백작부인, 카드 사기꾼, 피아노 연주자, 서커스 공연자 등. 그리고 힌덴버그의 젊은 정비원 칼 뵈스도 있다. 칼의 여자친구는 독일에서 프랑스계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 독일 비밀경찰의 정보에 의하면 요주의 인물. 결국 밝혀지지만 칼은 힌덴버그의 구조물 속에 시한폭탄을 장치해둔 상태이다. 리터 대령은 칼에게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킬 필요가 있냐고 설득한다. 결국 칼은 힌덴버그가 공항에 도착한 뒤, 승객이 모두 내린 뒤 폭발시키겠다고 한다. 시간은 오후 7시 20분. 그런데 기상악화로 착륙이 계속 연기되고 폭파시간을 다가온다. 무모한 게슈타포 포겔은 칼을 체포하여 고문한다.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리터가 겨우 폭탄장치를 발견하지만 그 순간 꽝~. 그 이후 이야기는 실제 힌덴버거 뉴스릴에 남아있는 처절한 장면이 이어진다.
 
    영화에서 칼이 힌덴버그를 폭파시키려는 의도는 히틀러에 대한 경각심 고취였다. 히틀러가 스페인 게르니카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를 세상에 알리겠다는 의도도 있다. 게르니카는 에스파냐(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이다. 1937년 4월 26일 에스파냐 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 나치스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곳이다. (피카소가 이때 비극을 ‘게르니카’라는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영화에서 프란츠 리터 대령은 게르니카 폭격 때 정보책임자로 근무한 것으로 설정된다. 리터는 평화로운 마을을 폐허로 만든 작전 때문에 나찌 히틀러에 심정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칼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고 현실적 대안으로 폭발시간을 조정하는데 합의했던 것이다.
 
영화 속 이야기
 
  영화 <힌덴버그>는 ‘사보타쥬 이론’에 맞춰 흥미롭게 끌어간다. 영화 초반에 웬 예언가 아줌마가 꿈속에 봤다면서 “난 예지력이 있다. 힌덴버그는 하늘에서 폭발한다. 내말을 믿어라. 난 다 알 수가 있다. 베티 데이비스가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게 될 것이고, 윈저 공은 심슨여사와 결혼 못 한다.”라고 덧붙인다. 알다시피 헐리우드 톱 여배우들이 모두 탐내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히로인 스칼렛 역은 ‘비비안 리’에게 돌아갔고, 영국 왕위계승자 1위였던 에드워드 8세는 영국왕위 자리를 동생에게 넘기고 이혼녀 심슨부인과 1937년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다. 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힌덴버그가 도착할 레이크허스트 기지 책임자가 잡지를 보다가 부관과 대화를 나눈다. “이 잡지에 이런 기사가 나왔군. 힌덴버그는 화재 등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그런데 이 잡지에 전에 그런 기사가 실렸어. 렌든이 루즈벨트에게 압승할 것이라고.” (1936년 선거에서 루즈벨트는 공화당의 알프 렌든 후보를 꺾고 대통령이 된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랜든이 이긴다고 나왔다. 여론조사와 실제결과와의 차이에 대한 예로 많이 거론된다.)
 
이들 대사 중에 이런 것도 있다. “이전에 ‘로스엔젤레스’호가 여기 왔을 때 기억나나?” “헬륨이 아니었다면 우린 여기 없을 거야.”라고.  독일 비행선 회사 체플린 미 공군을 위해 개발한 게 로스엔젤레스 (USS Los Angeles, ZR-3) 호이다. 

   미국은 잠재적 적국인 독일에 대해 헬륨판매를 거절한다. 사고 발생 직후, 히틀러는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에게 위로조문을 보낸다.
  
   ‘힌덴버그’는 당초 헬륨 가스를 채울 예정이었다. 그런데 당시 헬륨은 미국에서만 생산되었고 미국은 전략물자로 잠재적 적성국 독일에 대한 판매를 불허했다. 영화에서 리터 대령과 함께 레먼 선장이 탑승하는데 그의 임무 중 하나가 미 국무성에 헬륨 가스 판매를 요청하는 임무가 있었던 모양이다. 수소가스는 폭발위험성이 더 높다. 그 때문에 독일대사가 미국무성을 찾아가서 나누는 대사 중에 “힌덴버그가 폭발이라도 한다면 (헬륨 판매를 거부한) 미국도 비난받을 것이오.”라고 말한다.
 
 영화에서는 반(反)히틀러 대사가 많다. 피아노 연주자 ‘채닝’과 서커스 희극배우 ‘존 스파’가 하늘에서 공연을 하는데 히틀러-나찌스 풍자극이었다. 선장은 얼굴을 찌푸리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좋아한다.
 
 비행선 힌덴버그가 여객선보다 빠르다는 것도 보여주고, 굉장히 편안하다는 것도 보여준다. 뱃멀미 때문에 힌덴버그를 탔다는 대사도 있다. 그리고 만년필을 수직으로 세워놓아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장면도 있다. (왜, 독일 자동차 벤츠에 물 컵을 두어도 물이 찰랑거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옛날부터 전설같이 전해지잖은가)
 
 
 뒷 이야기: 힌덴버그의 최후는 대중에게 엄청난 시각적/정서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더 이상 비행선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힌덴버그 이후 1930년 LZ-130(그라프페펠린2)이 새로이 하늘을 날았지만 당시 독일 공군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의 명령에 의해 LZ-127, 130은 모두 파괴되었다. 비행선 황금시대의 종언이었다.
 
<힌덴버그>의 다룬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보면 1차대전 이후 미국도 비행선은 군사용으로 개발 이용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은 대형 비행선을 만들어 전투기 수송용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를 했다. 커티스 스패로우호크 단엽기 같은 전투기 4~5대를 품을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하늘의 항공모함인 셈이다. 그런데 사고가 잦았다. 1925년에는 세난도(Shenandoah)(▶위키피디아)가 번개에 추락했다.   


 1932년에는 애크론(akron)호(▶위키피디아)가 착륙 중 지상요원 3명 매달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2명이 차례로 떨어져 죽었다. 하필 그 장면이 고스란히 촬영되었다. 이 비행선은 뉴저지 코스트에서 추락했다. 76명 중 73명이 숨졌다. 
  
 

   크기가 239미터가 되던 메이콘(Macon)호(▶위키피디아)는 1935년 2월 12일 캘리포니아 해안가 포인트 서에서 추락했다. 이 비행선의 잔해는 오랫동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수중탐사로 잔해를 발견했다. (타이타닉 찾듯이 바다 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멋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허버트 모리슨의 중계방송은 많은 뒷이야기를 낳았다. 감정적인 중계를 했다는 이유로 방송사에서 해고되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다. 영화 <힌덴버그>에서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대형 화면에서 살아났다. 그의 목소리는 논란이 많았다. 녹음 속도에 인위적이 조작이 있은 것 아니냐부터, 당시 녹음기술의 문제까지. 여하튼 1999년에 WLS방송사는 방송사 창립 75주년 기념으로 모리슨의 중계방송을 처음으로 재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힌덴버그가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떠날 때 승객은 반 밖에 채우지 못했다. 그런데 귀환할 때는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고. 그 다음 주에 런던에서는 킹 죠지 6세의 취임식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 행사를 보기 위한 사람들이었다고.
 
1936년 힌덴버그호에는 피아노가 실렸었다.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알루미늄으로 특별 제작한 브뤼터너 그랜드 피아노였다. 그런데 1937년 비행에서는 피아노를 제거했단다. 그러니 영화에서의 피아노 씬은 거짓!
 
자.. 다시 힌덴버그 추락 원인은? 
사보타쥬 (테러) 음모론은 추락 초기에 벌써 대중화 되었다
  
  추락 이후 미국에서는 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정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사고 원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비행선 구조상의 문제, 정전기에 의한 발화, 성 엘모의 불 (세인트 엘모스 파이어.. 이런 제목의 영화도 있었고 팝송도 있다), 사보타쥬(테러).... 그런데 사보타쥬 이론은 1960년대 들어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사고 당시 곧바로 그런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날 비행선에 탑승하지 않았던 체플린의 전직 대표 휴고 에커너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그는 추락당시 오스트리아에 비행선 강의 여행 중이었다고 한다. 레이크하우스 기지의 사령관 찰스 로젠달도 1938년 비행선에 대한 책을 내면서 그런 의견을 소개했었단다. 1962년에 횔링은 자신의 책에서 테러범으로 ‘에릭 스펠’을 직접 지목했다. 스펠의 여자친구가 반나치 운동을 한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스펠도 그날 사고로 죽었으니 변명할 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고 말이다. 승객이었던 독일의 아크로바트(서커스 재주꾼같은) 요세프 스페도 용의자 중의 한사람으로 오랫동안 지목되었다. 그가 선상에서 반나치 농담을 했다는 것이 정황증거란다.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에서는 마지막에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했다. 전 NASA기술자가 당시 힌덴버그의 재질을 재구성하여 화재원인을 추적한 것이다. 뭐, 결론은 갑작스런 화재였다. 재질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박재환 2009-5-4) 

  우리나라 선관위에선 투표 독려를 위한 홍보도구로 비행선을 곧잘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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